라오스 의료체계 속 만성질환 관리와 한의학의 역할 탐색

2026-03-31 22:05 입력

[대만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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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쓰는 편지
3월에 쓰는 편지
소나무 한의원 강솔 둘째가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할 학교에서 2월에 커다란 사각봉투의 우편물이 왔다. <오거서 마음 편지>라는 제목의 안내문이었는데, 오거서란 다섯수레의 책을 뜻한다, 자녀가 대학에서 독서 문화를 체험하길 바란다, 부모가 편지를 써서 보낸다면 3월에 학교에서 그 편지를 전해주면서 책을 한권 주겠다 는 안내문과 함께 손 글씨로 편지를 쓸 수 있는 종이와 우편 봉투가 들어 있었다. 부모가 쓴 손 편지와 책 한권이라니. 나름 신선한 행사였다. 어떤 책을 줄지 궁금해서 편지를 써보기로 했다. 종이를 앞에 두고 있으려니 20여년간 아이를 키우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일하러 나오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못 나가게 울부짖는 아이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사춘기에는 사춘기의 사연이 있었다. 섬세하고 불안이 높은 아이에게 엄마로써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한참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엄마로써 아들한테 편지를 쓰려니 나 대학교 1학년때 딸로써 엄마한테 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1991년이니 벌써 35년전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갔다. 엄마가 없는 돈에 비싸고 가벼운 오리털 이불을 새로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기숙사는 밤 10시에 점호를 해서, 10시까지 귀가 해야 했었다. 그때는 각 층 복도마다 전화가 한 대씩 있고, 기숙사에 있던 학생 중에 전화를 교환 해주던 학생이 있었다. 기숙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하면 그 학생이 듣고 내용을 전달해주거나 2층 학생이면 2층 복도에 전화를 받을 수 있게 연결 해 줬던 것 같다. 3월에 신입생 환영회니 행사가 많았고, 향우회나 들어간 동아리들이 술을 엄청 많이 마시는 곳이었고, 나는 주는대로 술도 잘 받아 먹는 신입생이었다. 향우회였을까? 3월초 술을 마시다가 10시가 거의 다 되었는데, 다른 선배가 기숙사에 못간다고 연락을 하라고 하길래 전화를 했다. 못들어간다고. 그런데 그게 그 기숙사에선 절대 안되는 일이었던지 전화를 교환해주던 학생이 내가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내려갔다고 사감에게 전달, 사감은 집으로 전화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집에 계신 엄마는 얌전하던 딸이 대학에 가더니 기숙사에 거짓말을 하고 안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으신 셈이다. 다음날 기숙사에 갔더니 사감한테 엄청 혼이 났고 요주의 학생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전화를 교환해주던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뒤 집에서 편지를 받았다. 마치 인쇄한 듯 단정한 엄마의 편지. 왜 기숙사에 안 들어갔느냐는 내용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내 딸을 믿는다. 어떤 일들이 있더라도 정직하게 성실하게 해내리라고 믿는다. 엄마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 그런 구절이다. 태어나서 엄마에게 처음 받아보는 편지였다. 아마 그 뒤로도 엄마가 편지를 써서 보내신 일은 없었을 것 같으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도 같다. 나도 그닥 곱게 자라지는 않았다. 엄마는 내가 사과를 밤톨처럼 깎는다고 등짝을 후려 치기도 하고, 엄마가 직장 다니고 자주 아파서 집안일도 꽤 많이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그건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인데, 왜 본인 뜻대로 하지 않느냐고 잔소리 하거나 말을 심하게 하신 적은 거의 없다. 스무살의 3월에 받은 편지도 볼펜을 꾹꾹 눌러서 쓴, 힘이 들어간 글씨들 속에서, 기숙사 외박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편지의 아래쪽 끝에 내 딸을 믿는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 라는 구절만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안했던 것 같다. 그때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교사였던 엄마니까 오후에 학생들을 보내고 빈 교실에 앉아서 편지지를 꺼냈을지 모른다. 집을 떠나 보낸 딸이 걱정되고 불안했을 텐데. 최대한 말을 고르셨겠지.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을텐데, 왜 기숙사를 외박했느냐고 야단치고 길게 말하는 대신 엄마는 내 딸을 믿는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 라는 말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지난 30여년의 내 삶을 돌이켜 보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내려는 마음이 늘 있었다. 엄마의 그 편지 문구는 내 무의식 아래 늘 따라다녔던게 아닐까.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가 더 어려웠다. 이 편지를 내 아들도 35년 뒤까지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말을 한참 고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혼자 웃었다. 이것도 욕심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나도 결국은 그렇게 썼다. <아들아 너를 믿는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내기를 바란다. 너를 위해 기도 한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진심을 담은 기도일 것이다. 3월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1월보다 3월이 더 푸릇 푸릇 새로운 시작인 것 같다. 아들에게 편지를 쓰려다 엄마에게 편지를 받던 스무살의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스무살일 때 이렇게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30년 뒤는 상상할 수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서 이만큼 왔다. 이번 3월에는 나에게 쓰는 편지를 보내보면 어떨까. 30년 뒤에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기도한다... 라고 마무리하는 편지를 써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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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의료체계 속 만성질환 관리와 한의학의 역할 탐색
라오스 의료체계 속 만성질환 관리와 한의학의 역할 탐색
대만드(대신만나드립니다) 대구한의대학교 한의학과 이현서 나는 최근 라오스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비교적 큰 도시로 알려진 루앙프라방조차 산길이 많아 접근성이 떨어졌고, 환자들은 문화적 이유로 자신의 증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여러 동남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처럼 중풍과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질환 환자가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때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질병이 많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 이러한 질환들이 충분히 관리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왜 이러한 건강 문제가 반복되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환경에서 어떤 의료적 접근이 보다 적절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라오스의 만성질환 문제는 통계적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WHO에 따르면 30–79세 성인에서 고혈압 유병률은 약 29%에 이르지만, 조절률은 14%에 불과하다. 이는 단순히 환자가 많다는 것을 넘어, 실제로 질병이 적절히 관리되는 비율이 매우 낮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뇌졸중과 같은 심혈관질환 증가로 이어지며, 비감염성 질환이 전체 사망의 약 60% 이상을 차지하는 구조로 연결된다. 지표 값(연도) 인구 7,664,993명 (2023) 사망원인 비중 뇌졸중 13.4%, 허혈성심장질환 12.5% (2021) 사망의 NCD 비중 63% (2021) 뇌졸중 사망률(10만명당) 여성 87.1, 남성 83.5 (2021) 고혈압(30–79세) 유병 29% / 인지 45% / 치료 32% / 조절 14% 대사 위험요인(STEPS) 고콜레스테롤: 총 23.3%·남 15.4%·여 28.6% 혈당상승: 총 7.4%·남 5.8%·여 8.5% 출처: WHO 보건의료체계는 중앙–주–군–보건소로 이어지는 다층 구조를 갖고 있으나, 산악지형과 교통 인프라의 한계, 언어 다양성과 같은 구조적 제약이 의료 접근성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더해 실무적으로는 데이터 체계의 단절, 표준 부재, 수기 중심 업무가 지속되고 있어 만성질환 관리의 핵심인 환자 등록, 추적 관리, 복약 순응, 합병증 예방의 흐름이 충분히 유지되지 못한다. 특히 만성질환은 환자의 증상 인식과 행동 변화가 중요한데, 현장에서 느낀 ‘증상을 늦게 표현하는 경향’은 이러한 관리 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라오스의 의료 문제는 단순히 질병의 존재가 아니라, 질병이 연속적으로 관리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 가깝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라오스 정부는 Digital Health Strategy 2023–2027을 수립하였다. 이 전략은 인력, 거버넌스, 상호운용성 표준, 애플리케이션, 인프라라는 다섯 축을 중심으로 37개의 전략 프로젝트를 제시하며, 약 900만 달러 규모로 설계되어 있다. 이 전략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보건정보체계를 기존의 프로그램별 단절 구조에서 국가 단위의 통합된 전략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 있다. 특히 만성질환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전략은 첨단 기술 도입 그 자체보다 환자 등록, 혈압과 혈당과 같은 객관적 지표의 정기적 기록, 그리고 중단되지 않는 추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적인 관리 구조’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단일 진료행위가 아닌 연속적인 관리의 축적을 통해 결과가 달라지는 만성질환의 특성을 고려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의학, 그리고 한의학의 역할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었다. 라오스에서는 전통의학이 이미 널리 활용되는 보건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통의약품 등록과 같은 제도적 기반도 마련되어 있다. WHO 역시 전통,보완의학을 만성질환과 고령화 대응에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 평가하면서도, 안전성과 품질, 효과에 대한 규제와 데이터 기반 관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한의학이 이와 같은 환경에서 의미 있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치료 적용을 넘어, 표준화와 안전성 확보, 그리고 데이터 축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임상 영역에서 보면, 고혈압 관리에서 침 치료는 약물치료의 보조적 접근으로서 일정한 가능성을 보여왔다. 일부 메타분석에서는 침 치료를 병행했을 때 수축기혈압이 평균 약 7.47mmHg 추가로 감소한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또한 수축기혈압이 10mmHg 감소할 경우 뇌졸중 위험이 약 27%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혈압을 일정 수준 낮추는 개입은 공중보건적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라오스처럼 고혈압 유병률은 높지만 조절률이 낮은 환경에서는, 침 치료와 생활습관 관리, 복약 순응을 함께 고려한 접근이 조절률을 높이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한약이나 전통의약품의 활용에 있어서는 공급망과 규제 체계가 중요한 전제가 된다. 라오스는 전통의약품 등록 규정을 통해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적용을 위해서는 이러한 제도적 틀 안에서 품질과 안전성, 표준화를 충분히 확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동시에 디지털 헬스 시스템과 연계하여 처방, 복용, 이상반응과 같은 정보를 기록하고 축적하는 과정이 병행된다면, 전통의학 역시 보다 체계적인 보건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종합해보면, 라오스에서의 접근은 거대한 변화보다는 작고 점진적인 시도가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한 등록 기반 관리, 정기적인 혈압 측정과 추적, 그리고 보조적 치료 접근을 결합한 소규모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를 검증해 나가는 방식이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라오스에서 마주한 의료 현실은 단순히 의료 인프라의 부족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보다는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연결하는 구조의 부재가 더 근본적인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디지털 헬스 전략과 전통의학, 그리고 한의학은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치료를 선택하느냐보다는, 환자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관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라오스의 의료 문제는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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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가 천마를 캐러 간 이유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가 천마를 캐러 간 이유
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지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소년은 활을 집어 들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호랑이를 노려본다. 아마도 수양대군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리라. 부들부들 떨며 화살을 겨눈다. 숨을 조여 오는 두려움에 나약한 자신을 향한 분노를 얹어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호랑이를 향해 날아가 명중했고 소년은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이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나날들을 상상력을 더해 그려낸 이 작품은 현재 1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외로웠던 비운의 왕 단종 곁을 끝까지 지킨 엄흥도는 실존 인물로, 아무도 거두지 않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500년 만에 전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는 한 관람객의 평처럼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는 그의 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영화 중반, 엄흥도는 악몽과 불면에 시달리는 단종을 위해 ‘천마’를 캐러 간다. 한의사라면 자연스레 시선이 머무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이 천마는 어떤 약일까. 천마는 난초과 식물인 Gastrodia elata의 뿌리줄기로 [동의보감]에 “主諸風濕痺 四肢拘攣 小兒風驚癎 治眩暈風久癎服氣”라 기록되어 “온갖 풍습비, 사지에 경련이 이는 것과 소아의 풍간과 경기에 주로 쓴다”라고 되어 있다. 많이 놀라거나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때 복용하는 대표적인 약 우황청심원에도 들어있으며 평생 어지럼증에 시달렸던 영조는 자음건비탕이라는 처방에 천마를 첨가하여 자주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말 천마로 단종의 불면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한의학에서는 불면을 단일한 병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병리 상태에서 나타나는 결과적 증상으로 인식한다. [동의보감]에서도 불면은 하나의 질환으로 분리되어 다뤄지기보다 심, 신, 몽, 잡병 편 등 다양한 조문 속에서 등장하며 원인에 따라 심비양허, 심담허겁, 간기울결, 음허화왕, 담열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약재 하나로 해결하기보다 체질과 병인을 함께 살피는 맞춤 처방이 중요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왕의 한의학]의 저자 이상곤 한의사에 따르면 승정원일기에만 침수(寢睡)라는 단어가 2만 7210회나 나올 정도라 한다. 이는 임금의 수면 상태가 단순한 개인의 건강 문제를 넘어 국정 전반과 직결된 사안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0대 후반 수준에 머문다. 끊임없는 정무와 권력 다툼 속에서 쌓인 극심한 스트레스는 수면을 방해하고 전반적인 건강을 해쳤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이른바 울화병에 해당하는 신체적 증세를 보인 사례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선조는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가 가장 치성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상태를 직접 언급한다. 서자 출신이라는 컴플렉스와 사림과의 갈등,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소화불량과 이명, 편두통 등에 반복적으로 시달렸으며 그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종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자신을 지켜주던 이들을 모두 잃고, 믿었던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유배까지 온 열일곱의 소년. 단종이 겪었을 심리적 충격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단종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는 특정 질병에 대한 상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수척해진 모습과 기력 저하, 깊은 불안과 슬픔에 잠긴 상태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단종이 영월군 객사인 동헌에서 머물 때 지었다는 아래 시는 그가 견뎌야 했던 길고 고통스러운 밤, 곧 불면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一自寃禽出帝宮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聲斷曉岑殘月白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血流春谷落花紅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何奈愁人耳獨聰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출처: 나무위키) 한의학적으로 본다면 그의 상태는 심한 스트레스와 억울한 마음으로 인한 간기울결,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심담허겁, 여기에 식사 부진으로 인한 비허까지 겸한 복합적인 양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불면뿐 아니라 심계, 정충, 두통, 흉민 (가슴 답답함) 등 다양한 증세를 겸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한 가지 약재로 다스리기보다는, 기울을 풀고 심신을 안정시키며 기혈을 보하는 방향의 복합적인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호, 향부자와 같은 이기약에 더해, 복신, 원지처럼 심신을 안정시키는 약재, 그리고 용안육, 당귀, 백작약 등 보혈약을 함께 배합하는 방식이다. 물론 엄흥도도 천마 하나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의사의 눈으로 보면 엄흥도가 천마를 캐러 나섰다는 설정은 단순한 약재 채취를 넘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천마는 위에 언급했다시피 간풍을 식히고 놀람과 경기를 가라앉히는 효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놓인 어린 왕의 심신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투영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어린 소년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의학은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을 본다. 엄흥도가 캐러 간 천마에 단종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듯, 내가 내리는 처방이 그의 마음에 온기를 더했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는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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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가 뭐 하는 사람인데?
한의사가 뭐 하는 사람인데?
이천시 남부통합보건지소 공중보건의 김제관 지방의 보건지소 치고는 많은 수의 환자가 오는 곳에서 일하다보니 여느 공보의들보다는 많은 환자들을 봤다. 최근에는 지인들의 치료 요청도 잦아 다양한 케이스를 본 것 같다.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감사해하는 경우도, 신기해하는 경우도 있다. 지인이니까 싸게 줄 수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약값으로 십수만원 소비하는 게 마냥 싸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텐데 본인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한약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의사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일들이지만, 또 혹자는 불편해할 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들어 드는 생각들을 몇 가지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런 것도 한의학으로 치료가 되는거야? 생각보다 사람들이 한의학을 잘 모른다. 한의원에 왜 가는지도, 한의사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지인의 골프엘보를 치료하면서 들었던 말은, 이런 근육통이나 관절통으로 한의원을 갈 생각을 못해봤다는 것이었다. 사실 정형외과에서는 근육보다는 뼈가 메인이 되지만 우리는 대충 근골격계 전반을 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편 문외한의 입장에서 ‘한의원’이라는 단어를 듣고 근골격계 질환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미 한의원에 다니던 사람들이나 아는 거지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가면 괜히 비싼 보약이나 먹으라고 할 것 같은 무서운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한의원 창문을 봐도 ‘교통사고, 추나’등은 많이 쓰여 있지만 근육통, 관절통, 두통, 생리통 등이 쓰여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한의학계 차원에서의 홍보, 한의사 개인으로서의 마케팅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한의사가 수술은 못 하지만 또 생각보다 치료 가능한 질환군이 넓지 않은가? 한약은 비싼 거 아닌가? 한약값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말이 있다. 90년대에도 한 제에 30만원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GDP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때보다 가격이 오르기야 했지만 2002년도에 겨우 1인당 총소득이 만 달러를 넘은 것을 생각하면 삼만 달러대 중반을 돌파한 지금 소득 대비 가격이 매우 낮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약의 수요는 매우 줄었다. 국민 건강수준이 올라가고 영양상태도 좋아졌으며 의학지식에 접근하기가 쉬워진 탓일까? 혹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비싼 가격에 비해 적절한 효과를 느끼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의 한약 값이 그 시절보다 오히려 저렴할 수도 있다. 한약이라고 하면 오로지 원내에서 탕전한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짜먹는 한약도 나왔고, 첩약의 건보 적용 시범사업도 진행 중이다. 한의원과는 관계가 없지만 약국에서도 한약 기반의 약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나도 몇 달째 기침을 달고 살다가 삼소음 보험제를 열흘쯤 먹고 지금은 기침을 하지 않는다. 저렴하게 훌륭한 한약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시대다. 훌륭한 보완대체재 약간은 서글픈 얘기일수도 있지만 한의학은 명백한 보완대체의학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학의 빈자리를 꽤 훌륭하게 채울 수 있다. 손목이나 팔꿈치 통증으로 정형외과나 통증의학과에 수도 없이 내원하는 환자를 조금 더 광범위한 침치료 몇 번으로 낫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약침에 추나까지 다 시행하더라도 주사 한 대 값보다 저렴할 수 있다. 힘줄의 염증부위에 어떤 약액이 들어가는지보다 관련 근육군의 이완이 더 중요한 질환인 경우 더 싸고 효율적인 치료방법인 것이다. 또 시험관 시술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수백만원의 치료비를 내는 부부에게 한약 두 제 정도로 아기천사를 선물해줄 수도 있고, 내시경이나 혈액검사상 아무 문제가 없는 소화불량, 만성피로 환자에게 큰 돈 들이지 않고 편안한 속과 활기찬 하루를 살아가게 해줄 수도 있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의학은 이제 우리 삶에서 사라진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뭐든 그렇듯이 완벽하기는 어렵다. 지식의 한계일 수도, 효율이나 경제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한의학은 일차의료의 한 축으로서, 현대의학의 빈자리를 채우는 보완대체의학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의 연구와 노력, 그리고 학계 차원에서의 홍보와 정책 참여가 적절히 행해진다면 가성비 좋은 국민건강 증진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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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일 의학 교류의 중심, ‘조선의 반도체’ 인삼의 비밀을 풀다
18세기 한일 의학 교류의 중심, ‘조선의 반도체’ 인삼의 비밀을 풀다
대한공중보건한의사협의회 경상남도 대표 김태준 본문: - 17세기판 무역 전쟁: 조선의 인삼 수출 통제(禁蔘)와 일본의 밀수 대작전 - 통신사 의학문답으로 본 치열한 '자원 무기화'와 한일 정보전 - 효능 중심의 조선 vs 명물학적 실증주의의 일본, 극명하게 엇갈린 본초학의 궤적 설명=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국서데이터베이스) 최근 주식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연일 상승 랠리를 펼치며 경제 뉴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반도체 패권이 한 국가의 명운을 결정짓는 시대, 세계 각국은 첨단 기술 유출을 막고 공급망을 쥐기 위해 치열한 무역 전쟁과 수출 통제를 불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18세기 조선의 최고 하이테크 수출품이자 전략 물자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삼(人蔘)’이다. 과거 한의학계에서 발굴 및 번역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조선통신사 의학문답 기록과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 인삼을 둘러싼 일본의 열광적인 관심과 양국 간의 살벌한 '무역 전쟁'의 실체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17세기판 반도체 수출 통제: 삼도구 사건과 조선의 '금삼(禁蔘) 정책' 오늘날 강대국들이 희토류나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며 제재를 가하듯, 17세기 후반 조선 역시 인삼 수출을 전면 차단한 적이 있었다. 발단은 1685년,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이 인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가 청나라 관리를 조총으로 쏘아 상해를 입힌 '삼도구(三道溝) 사건'이었다. 외교적 분쟁을 우려한 조선 조정은 즉각 북쪽 국경의 인삼 채취를 금지함과 동시에, 이듬해인 1686년부터 동래 왜관을 통한 일본으로의 인삼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강력한 '금삼(禁蔘) 정책'을 단행했다. 공식적인 수입로가 막히자 일본 대마도번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조선 인삼은 일본 내 의약품 수요를 감당하는 것을 넘어, 대마도 도주가 에도 막부에 반드시 바쳐야 하는 핵심 진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진상품이 끊겨 막부의 눈밖에 나면 번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기에 대마도번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외교 사절인 재판차왜(裁判差倭) 히라타 쇼자에몬은 이례적으로 무려 4년이나 왜관에 체류하며 조선 측에 수출 금지를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렸다. 동시에 이들은 외교적 해결에만 기대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왜관의 역관들을 매수하여 한밤중에 수백 근의 인삼을 몰래 빼돌리는 등 대규모 밀무역을 조직적으로 자행했다. 이는 현대의 수출 제재망을 뚫고 첨단 부품을 밀수하려는 국가 간의 암투를 방불케 한다. 자원 안보를 향한 일본의 집념: 국산화 야망과 명물학의 태동 일본이 인삼의 '국산화'에 사활을 걸었던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인삼 수입으로 인한 막대한 은(銀)의 유출을 막으려는 경제적 목적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일방적인 금수 조치(수출 통제)에 휘둘리지 않고 자국의 '의료 안보'를 지키기 위한 절박함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절박함은 초기에는 눈물겨운 '대용품 찾기'와 '가공' 노력으로 나타났다. 1711년 신묘사행 당시 일본 의사 기타오 슌포(北尾春圃)는 사삼(沙蔘) 실물을 들고 와 조선 의관에게 보여주며 사삼이 인삼의 대용품이 될 수 있는지 캐물었다. 또한 1748년 무진사행 때는 카와이 슌코(河春恒)가 일본산 인삼의 쓴맛을 감추기 위해 감초물이나 꿀물에 담가 단맛이 나게 가공하여 조선 인삼의 대용품으로 쓰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대용품이나 가공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결국 이들의 집념은 본초를 대하는 양국의 관점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조선의 의학계가 약재의 '임상적 치료 효능'에 집중했다면, 일본은 약재의 명칭, 유래, 산지, 형태, 감별 등을 집요하게 따지는 명물학(名物學)적, 박물학(博物學)적 관점으로 빠져들었다. 어떻게든 조선 인삼의 생태와 재배 노하우를 알아내기 위해, 통신사를 맞이한 일본 의사들은 옛 본초서의 기록을 근거로 삼아 인삼이 자란다는 '가수나무'의 형태까지 꼬치꼬치 캐물었을 뿐 아니라, 자국에서 채취한 가짜 인삼을 들고 와 진품 여부를 끈질기게 감별해 달라고 요청했다. 노로 겐죠(野呂實夫) 등 일본의 본초학자들은 아예 60여 종의 동식물 목록을 들고 와 형태와 산지를 캐묻기도 했다. 물론 첨단 바이오 자원의 유출을 막으려던 조선 의관 조숭수(趙崇壽) 등은 "우리는 의학을 논하는 사람이지 채약인(採藥人)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고, 민간에서 은밀히 인삼 재배가 시작되고 있었음에도 "인삼은 영물이라 인위적 재배가 불가능하다"며 고도의 '정보 방어전'을 펼쳤다. 그러나 막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의 집념은 결국 결실을 보았다. 에도 시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1720년대에 도쿄 고이시카와(小石川) 등 대규모 국립 약용식물원(사진2)을 조성했고, 일본 학자들은 1728년경 닛코(日光) 등지에서 조선 인삼 종자를 직접 시험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본초학자들은 책상에서 의서를 외우는 대신, 식물원에 나가 흙을 만지고 재배하면서 서양의 린네(Linnaeus)에 버금가는 실증적 식물분류학을 태동시킨 것이다. 현재 일본의 약학대학들이 부속 '약용식물원(藥用植物園)'을 필수로 갖추고 학생들이 생약을 직접 재배, 관찰하는 전통은 수백 년 전 조선의 무역 통제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에도 시대 본초학자들의 뼈저린 유산일 것이다. 설명=京浜にけ, CC BY 3.0, 위키미디어 공용) 18세기의 엇갈린 궤적, 현대 한의학과 캄포(漢方)의학의 차이를 빚어내다 18세기 조선통신사를 무대로 펼쳐진 인삼 전쟁과 본초학의 엇갈린 행보는 단순한 과거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임상 효능과 인체 내부의 병리적 원리 탐구에 집중했던 조선의 학풍은 약재의 외형과 산지를 파고든 일본과 확연히 달랐다. 조선 의학계는 『동의보감』 등의 종합 의서를 바탕으로 질병의 원인과 처방을 체계화하며 정교한 변증(辨證) 체계를 구축했고, 이러한 학문적 토대는 19세기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으로 이어져, 환자 개개인의 장부 대소와 체질적 특성까지 깊이 있게 고려하는 고도화된 맞춤 의학을 꽃피우게 했다. 반면, 인삼을 국산화하기 위해 토양을 분석하고 종자를 연구했던 일본의 명물학적 집념은 약재의 실증적 규격화와 식물분류학으로 이어져, 현재 일본 캄포(漢方)의학 특유의 규격화된 생약 연구와 제약 산업의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결국 양국의 치열했던 정보전은 각자의 환경에 맞게 전통의학을 진화시킨 원동력이었다. 300년 전에는 서로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평행선을 달렸지만, 이제는 각자 발전시켜 온 두 의학의 강점과 궤적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의 기록이 한국의 한의학과 일본의 캄포의학이 왜 지금과 같은 차이를 가지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적 거울이 된 셈이다. 참고문헌이해진, 「17세기 후반 조선의 禁蔘 정책과 대일 인삼 무역」, 『사총(史叢)』, 2024. 차웅석, 「18세기 조선통신사를 통한 한일의학문화교류」, 『동의생리병리학회지』, 2006. 조기호, 「근세일본 한방의학 산책」, 물고기숲, 2025. 저작권자 © 메디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