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 이하경
[한의대 영감록]은 한의대에서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의학 지식 사이로 흘러나온 영감들을 모아 펼쳐본 시리즈입니다.
불가리아를 여행 중입니다. 수도인 소피아는 쭉 뻗은 대로와 광활한 광장, 유럽풍의 대형 건물이 곳곳에 있어 거리에 나서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넓어지는 듯한 기분을 주는 도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소피아에서는 여러 젊은이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가진 자유로운 삶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에어비앤비 숙소의 같은 층을 쓰던 Z와는 같이 저녁을 먹으며 알게 된 사이입니다. 큼직한 돼지고기 위로 각종 허브를 올리며 저녁을 만들고 있을 때 그가 마침 주방에 들어와 인사를 건넸고, 저는 그에게 저녁을 차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가 방에서 들고 온, 낮 동안 마시고 이제는 아주 조금 남아버린 미지근한 병맥주 속에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흥미로운 삶의 이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으나 교수가 되어 점잖은 체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으리라는 판단에 2년째 세계여행을 하다가 이곳 불가리아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프랑스 문학, 그중에서도 알베르 카뮈의 작품에 관해 연구를 이어왔다는 것을 듣자 저는 문득 구름 사이로 난 햇빛에 갑작스레 눈이 부신 듯한 단절을 느꼈습니다. 한의대에 가기 위한 재수 시절, 그리고 한의대에 들어와서도 카뮈의 글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제 모습이 분명히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불문과에 진학해 카뮈에게 더 본격적으로 빠져들지 않는 스스로가 속물 또는 딜레탕트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한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었고, 한의대에 온 후에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Z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문과에 진학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는 다른 버전의 제 모습이 떠올라 생경했던 것입니다.
한의대에 있다 보면, 정확히 말해, 시도와 경험을 반복하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시기인 20대의 첫 6년을 작은 도시에 있는 한의대의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보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조금은 잊고 지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존재조차 불확실한 가능성을 캐내고자 사방팔방으로 활개치고 다니는 과정에서 잠재력이 생겨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몸을 푹 적시기 위해 바다로 달려가는 길에 이미 땀으로 온몸이 젖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지나온 대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저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듯합니다. “신이건 태양이건 셰익스피어건 외판원이건, 자신을 통과하지 않기 위해 세상의 끝으로 길을 나선 존재는 실상 자신이 통과되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 자신이 된다네.*”
Z는 발칸반도에 조금 더 있다가 프랑스로 가 프랑스어 회화를 제대로 배워 보고, 내년쯤에는 중국으로 돌아가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고민해 볼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가 앞으로 살아갈 삶이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설거지를 마친 그와 헤어지고 고요한 제 방으로 돌아와 눕자, 제가 궁금해하던 건 그가 아닌 제가 살아갈 삶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 『율리시스 2』, 제임스 조이스, 이종일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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