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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에의 두려움

기사입력 2025.08.2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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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 남부통합보건지소 공중보건의 김제관

 

 

공보의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다. 혹자는 인생의 마지막 방학이라고 표현하더라. 공보의 기간이 자기 인생의 황금기였다며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공보의가 되면 반드시 나태해질 것이라며 단언하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환자도 보고 출장도 나가지만 필드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공보의 치고 환자를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인 나조차 이럴진대 소위 날로 먹는공보의들은 도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감이 안 온다.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것들을 정리해 본다. 오늘은 세차하다가 든 생각을 써내려가 보려고 한다.

 

나는 차가 좋다. 전에도 어디엔가 썼던 것 같다. 정말 다양한 이유로 좋지만 차의 철판 부식을 보호하기 위한 깊은 색감의 도장이 좋아 세차에도 빠졌다. 보통 주 1, 회당 2~3시간 정도를 소요한다. 맑은 광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들여야 할 노력이 많다. 단순히 체력과 시간을 소모하는 걸 넘어서 세차의 프로토콜을 연구해야 하고 각종 약품들의 용도와 사용법을 숙지해야 하며 도장면 구석구석을 날카롭고 집요하게 뜯어보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온 세상을 담아낼 것 같은 아름다운 도장면이 날 흡족하게 한다. 세차의 목적은 꼭 광택 감상뿐만은 아니다. 나에게 뭐라도 소비할 컨텐츠가 있다는 것, 적어도 세차 도중에는 땀 뻘뻘 흘리면서 도장면의 작은 흠집이나 자국과 같은 사소한 것에만 집중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있다. 그렇게 공을 들여 세차를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취미인데, 꼭 취미가 있어야만 하는가?

 

뜬금없는 말로 들릴 수 있겠다. 얼굴 시뻘게져 가며 왁스칠을 하다가 한다는 소리가 취미가 있어야 하냐니. 사실 이건 아직 내가 많이 어릴 때 느꼈던 감정들이 갑자기 기억난 거다. 초등학교 때였나, 교과서에 실린 취미의 종류에는 축구, 독서, 음악 감상, 우표 수집 등이 있었다. 난 독서를 좋아했고 음악도 즐겨 들었지만 축구는 친구들이랑 가끔 하는 정도였고 우표 수집에 대해서는 저런 게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1학년, 내 최대의 취미는 침대에 누워서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게 되었다. 그 때 취미로서의 운동은 부담으로서 다가왔다. 난 운동 안 하는데, 그럼 내가 못난 사람인가? 그런 취미가 꼭 몇 개씩 있어야 하나? 마치 누군가 나에게 너는 운동 하나 취미로 삼지 못하는 게으른 인간이다라고 질책하는 느낌조차 가끔 받았다. 뭐 그냥 내가 예민한 것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최근에도 계속 받는 인상들이 있다. 여행은 공부이고 견문을 넓히는 경험이며 젊은 나이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견. 여행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여론이 그렇다고 하니 내가 틀렸나 긴가민가한다. 내 일상 루틴을 깨고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없으며 준비하는 과정도 길고 정작 가서는 오로지 소비만을 긴 호흡으로 하다 오게 되는 오락 혹은 여가생활 정도로 정의하고 싶은데, 여행을 대단한 의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입 밖으로 꺼낸적은 잘 없다. 또 운동에 대한 열의도 사회적으로 끓어오르는 것 같다. 누워서 유튜브 보고 있는데 거기서도 운동하라고 하더라. 난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러닝같은 유산소 운동을 하면 너무 힘들더라. 물론 하면 건강에 좋은 걸 누가 모르겠냐마는 안 하는 내가 게으름뱅이가 되는 것 같아 이런 흐름이 썩 달갑지는 않다.

 

약간은 다른 얘기지만 비슷한 맥락의 현상을 대학교 다니면서 하나 더 봤다. 이 글을 보는 독자층이 어디까지인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한의대 다니면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학회 문화였다. 이미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니면서 학회라는 이름의 사교육을 또 돈 내고 들으러 가더라. 강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당연히 가깝지도 않고 싸지도 않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기를 쓰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그건 한의사가 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나 역시 학회 강의를 어느정도 듣고 있다. 그 당시 나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도 다 알지 못하는데 저런 선행학습, 사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학생 상대로 장사하는 그 학회라는 집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수요가 있어 공급이 의미를 가졌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수요의 원천이 바로 낙오에의 두려움이다.

 

취미도, 사교육도, 다 마찬가지다. 꼭 취미가 뭐냐고 묻는 게 싫었던 이유. 취미로서의 운동이나 여행에 거부감을 느낀 이유. 주말마다 학회 강의를 듣는 행태를 고깝게 본 이유.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 가면 되는 건데 구태여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바로 두려움이었다. 혹시나 운동을 하지 않고 여행을 다녀오지 않으면 뒤처질까봐, 학회 강의를 듣지 않는 나만 무리에서 낙오할까봐. 하기 싫으니까 하지는 않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혹시 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 없지만 혼자서 압박을 느낀 거다. 그 압박감의 반작용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거고. 꼭 취미나 학습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도 그렇다. 속한 무리 내의 여론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그 불안감이 바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이다.

 

혹시나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 있다면, 그러지 말자고 할 것이다. 공부를 해도, 불안해서 책을 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필요성을 느끼는 때에 집중하게 되고 효율이 높으며 남는 게 많다. 내가 원해서 하는 활동이라야 재미가 있고 몰입할 수 있으며 비로소 취미라고 할 만한 게 된다. 취미가 있어야 해서, 공부를 해야 해서, 여행을 가야 해서, 운동을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다. 안 하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지금 당장 내가 불편한 게 없으면 안 해도 된다. 내 중심 잡고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참고사항이며 취사선택은 나의 몫이다. 남들이 하는 테니스나 골프보다 세차가 즐겁고, 책 펴고 강의 들으면서 온 몸의 근육 압통처를 외우는 것보다(뭐 당연히 이것도 알기는 해야 한다) 내 등 통증이 결국 능형근도 흉부 장늑근도 아닌 중하부 승모근의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된 게 더 와닿았다. 이건 나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불안해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사고하여 그대로 밀고 나아가자. 당장 취미가 없어도, 당장 뭔가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안 하고 있는 거라면 반드시, 그래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낙오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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