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한의원 원장 강솔
어렸을 때 나는 동네에서 드물게 바둑을 두는 여자아이였다. 엄마가 동생과 함께 가르쳐주셨는데, 동생은 흥미를 금방 잃었고 나는 바둑을 좋아했다. 따로 떨어져 살고 계시던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주말 내내 바둑을 가르치셨다. ’바둑은 집을 짓는 것’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가르침이다. 다음 수와 그 다음 수를 계산하고 넌지시 다른 데로 상대방을 유도하면서 내 집을 넓혀 가는 것... 더 자라서는 추리소설 매니아였는데, 추리소설과 바둑은 내게 비슷한 느낌이었다. 너무 지키는 바둑이라고 아버지가 늘 뭐라고 하셨는데, 그럭저럭 아버지와 친구들한테 기재 있다 소리 듣던 유년 시절의 즐거움은 막내동생이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엄청난 기세로 성장한 막내동생에게 바둑을 두는 족족 지고, 처참하게 지고, 가차 없이 지고, 난 뒤로 바둑을 그만두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막둥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 막내가 좋아했던 기사가 이창호. 이창호와 나이가 비슷한 막내는 스무살의 이창호가 바둑계를 평정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가 좀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더 나이 들어서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이창호야 하고 남매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래서 내게 승부는 특별한 추억의 영화였다. 이창호의 승승장구 시절 티브이에서 바둑 해설을 하던 장면을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보던 시간과 공간이 쓱 떠오르게 하는 영화였다. 이창호 역을 유아인이 맡다니, 좀 아쉬워했다. 이병헌 유아인 두 배우가 다 나는 호감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두 배우에게 놀랐다. 특히 유아인은 어찌 그렇게 이창호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익숙한 바둑 대국장과 티브이 해설..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10초 남았습니다, 하나, 둘, ..’하고 세던 여자분 음성이 귓가에서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저런 즐거움과 함께 중년의 길목에서 본<승부>는 울림이 꽤 컸다. 스승과 다른 바둑을 두는 길을 선택하는 이창호. 제자에게 너무 빨리, 처참하게 패배하는 조훈현. 공개적으로 바둑을 두고 난 뒤, 이기고 지고 같은 차를 타고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대국이 끝나고 차라리 각자 얼굴을 안 보다가 좀 시간 지나서 보면 좋을걸... 그 장면이 제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자랄 때, 꼭 아이들이 아니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기대와 가르침을 따를 때 그를 존경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한다. 상대방이 압도적인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그래서 가스라이팅이 성립되는 게 아닌가) 어린 나이에 스승의 기세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하는 박찬호를 생각해보면 참 쉽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집안으로 들여 제자로 키우는 아이에게 연거푸 대국을 질 때, 그때의 조훈현을 생각하면 그 순간의 참담함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막둥이에게 연거푸 바둑을 지고 꺼이 꺼이 울던, 심지어 동생 앞에서 우는 것도 자존심 상해서 내 콧잔등을 쥐어 뜯던 내 어린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라도 그런데 하물며. 두 사람 모두 참 힘든 시간이었겠구나.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는 나라는 사람을 확립해 가는 것,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어린시절의 성장이다. 질 수 밖에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나이든 시절의 성장이다. 나는 이 영화가 유명한 두 바둑 천재의 이야기라기보다 내 아들과 나, 이제 자라는 청소년과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읽혔다. 아이들은 자라며 절대적 권위에서 독립하며, 어른은 자라나는 세대를 보면서 내가 믿고 있던 가치관이나 삶을 다시 돌이켜보고 받아들이는 것. 그 과정에는 물론 고통이 함께 한다. 상생과 함께하는 상극. 그 과정 중에 우리는 누구라도, 어떤 나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묵묵히 버티면서 그 시간을 거쳐가는 것, 묵묵히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믿고 지나가는 것이, 누구에게도 어떤 나이에도 필요하다. 이 영화는 나에게 성장에 관한 영화로 읽혔다.
그리고 승부에서 명대사. 요즘 나에게 진심으로 와 닿는 말.
‘모든 것이 다 체력이다. 불쑥 손이 나가는 경솔함, 대충 타협하려는 안일함, 조급히 승부 보려는 조급함, 이 모든 게 다 체력이 무너지면서 나오는 패배의 수순이다.’
승부, 성장과 체력의 키워드를 남긴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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