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공중보건한의사협의회 경상남도 대표 김태준
한국과 일본의 진료 현장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건강보험 한약 1위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한국 한의원에서는 요통, 관절통 등 근골격계 통증에 많이 쓰이는 '오적산'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합니다. 반면, 일본 병의원에서는 외과수술 후 장폐색 예방 등에 쓰는 '대건중탕'과 감기에 쓰는 '갈근탕'이 1, 2위를 다툽니다. 일본의 대표 한약회사인 쯔무라제약의 매출 1등 처방 또한 대건중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1, 2위 처방 모두 1,800년 전 후한 시대 장중경이 저술한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에서 단 한 글자도 변하지 않은 순도 100%의 '고대 처방(고방,古方)'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古方사랑 현상은 양국의 보험한약 전체 목록을 비교해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한국의 건강보험 한약 56종 중 상한론 기원 처방은 약 28%(16종)에 불과한 반면, 일본은 건강보험 엑스제제 148종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70여 종(약 50%)이 오직 상한론과 금궤요략에서 유래했습니다.
동아시아 3국의 전통의학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현재 일본의 캄포(漢方)의학은 특정 증상에 특정 처방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철저한 '실증적인 임상'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일본 캄포(漢方)의학은 왜 이토록 상한론에 깊이 몰두하게 된 것일까요? 그 해답은 에도시대 중기 일본 열도를 휩쓴 거대한 '인문학적 사상 혁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주자학의 붕괴, '실증'을 향한 사상적 반항
개국 이래 주자학(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고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던 조선과 달리, 일본 에도시대의 풍경은 조금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며 조닌(町人, 상인) 계급이 부를 축적하자, 사회 전반에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같은 굵직한 사상가들이 등장해 비판을 던집니다. 후대의 자의적인 해석이 덧칠해진 주자학의 사변적 우주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입니다. 이들은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공자와 맹자가 썼던 오리지널 텍스트(원전)로 바로 돌아가자"며 문헌의 실증적 탐구를 중시하는 고문사학(古文辭學)과 고의학(古義學)을 주창했습니다. 이는 사변적인 철학을 배제한 '복고주의적 실증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2. 의학계로 번진 복고 운동, 고방파(古方派)의 탄생
인문학계에서 시작된 이 '실증적 복고'의 불길은 곧장 의학계로 옮겨붙었습니다.
당시 일본 의학의 주류는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체의 생리와 병리를 오운육기와 음양오행으로 설명하던 후세파(後世派)였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깨어난 실증주의 학자들의 눈에 이는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 허세'로 비쳤습니다.
이들은 추상적인 우주론을 전면 배척하고, 관념이 덧칠해지기 전인 고대 중국의 가장 순수하고 실용적인 임상 기록 상한론으로 회귀할 것을 선언합니다. 복잡한 철학은 치우고, "환자에게 이런 증상(證)이 나타날 때 이 처방(方)을 썼더니 낫더라"는 텍스트 그대로의 사실, 즉 팩트에만 집중하자는 이들이 바로 일본 캄포(漢方)의학의 뼈대가 된 고방파(古方派)입니다.
3. 중국, 한국과의 결정적 분기: 3국 3색의 독자적 진화
흥미로운 점은 상한론으로 돌아가자는 학술적 움직임이 명·청 시대 중국에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의학은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완전히 다른 세 갈래 길로 갈라집니다.
중국은 새롭게 창궐하는 전염성 열병들을 마주하자, 상한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이를 보완하는 '온병학(溫病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전시켰습니다. 반면, 상한론의 텍스트를 절대적인 진리로 생각하던 일본 고방파 학자들에게 청나라의 온병학은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대신 일본이 채워 넣은 것은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 의학(난학, 蘭学)이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해부하는 서양의학의 극단적인 실증성은 고방파의 텍스트 실증주의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여기에 당시 한국(조선)의 행보를 더해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완성됩니다. 명나라 멸망 후 스스로를 중화의 정통을 잇는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했던 조선은, 오랑캐로 여긴 청나라의 신학문(온병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동의보감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했습니다. 그 결과, 환자 개인의 타고난 심성(마음)과 장부의 대소를 중시하는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라는 전무후무한 체질 의학으로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결국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음에도, 청나라(중국)가 새로운 질병에 맞서 '온병학'으로 외연을 넓히고, 조선(한국)이 소중화사상 속에서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사상의학'으로 깊어질 때, 일본은 형이상학적 철학을 완벽히 거세한 실증적 상한론과 해부학적 서양의학이라는 파격적인 독자 노선을 구축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캄포(漢方)의학이 철저하게 '증상'과 '처방'을 일대일로 매칭하는 임상적 성향을 띠게 된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조기호. 근세일본 한방의학 산책: 후세파·고방파·절충파의 뿌리를 찾다. 군자출판사; 2022.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번역. 서울: 통나무; 1995.
미나모토 료엔.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 정병철 번역. 서울: 예문서원; 2000.
샹징징. 의학과 유학: 중국과 일본의 유의. 이나미 번역. 서울: 인문서원; 2023.
이시다 히데미. 중국의학사상사. 도쿄: 동경대학출판회; 1994.
에도시대 의학자 나가야 슈테이가 성무기의 주석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편찬한 산정상한론(刪定傷寒論). 일본 캄포(漢方)의학이 중국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실증적 관점에서 문헌을 재해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출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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