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진로 선택지 다양화: 한의학의 영토를 넓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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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선택지 다양화: 한의학의 영토를 넓히다

기사입력 2025.11.2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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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 김미주

 

 91회 한의사 국가시험이 임박했다. 지난 6년의 학업을 갈무리하고, 마지막 관문을 넘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는 본과 4학년 선배들의 뒷모습을 보며, 본과 3학년의 끝자락에 있는 나 역시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저 모습은 곧 1년 뒤 마주할 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감과 함께 은근히 스미는 감정은 졸업 후 미래에 대한 부담감이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일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임상 과목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국가고시 합격증을 쥔 그다음 단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다.

입학 후 5년을 공부한 지금도 나는 임상의(부원장, 개원) 혹은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외에 한의사가 어떤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임상 이외의 진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 막막함이 비단 나 혼자만의 고민일까? 안타깝게도 통계는 이 진로 다양성의 빈곤이 한의대생 전체의 현실임을 보여준다.

 

(1) “몰라서 못 간다는 학생들의 외침

2023년 한의약융합연구정보센터(KMCRIC)가 전국 한의대 본과 4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졸업 후 진로로 임상의를 택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경제적 이유나 개인적 사정이 주된 요인이었으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다음이다. 바로 상당수의 학생이 정보 부족으로 인한 선택의 제한때문에 다른 길을 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의대 졸업 후에 대부분이 부원장이나 개원 등의 임상의가 되는 것은 하고 싶은 분야가 없어서가 아니다. 임상 외에 연구, 산업, 공공 분야로 나아가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또 그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그 길을 먼저 간 선배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길로 몰리는 것이다. 이는 학생 개인의 선택 문제를 넘어, 한의학 교육과 진로 시스템이 진료실 안의 의사를 찍어내는 데에만 머물러 있음을 방증한다. 다양성이 사라진 생태계는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의학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나, 눈에 띄게 나타나는 변화가 없는 것은 내수용 임상에만 고여 있는 한의계 전체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2) ‘한의과학자를 기르는 해외, ‘개업의만 남는 한국

시야를 전세계로 돌려보면 우리의 현실은 더욱 뼈아프다. 해외 전통의학 교육은 이미 다변화된 진로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중국의 경우, 중의약 대학들은 교육 과정부터 임상가트랙과 연구/산업트랙을 세분화한다. 졸업생들은 천연물 신약 개발 연구원, 중의약 국제 표준화 전문가 등으로 진출하며 제약 산업과 국가 정책의 핵심 인력으로 성장한다. 미국 역시 NIH(국립보건원) 산하 기관을 중심으로 통합의학 연구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한다. 이들은 병원이 아닌 연구소와 국제기구에서 전통의학의 과학화와 세계화를 주도한다. 반면, 한국의 한의대생들은 졸업 직전까지도 부원장 자리는 어디서 구하나를 고민해야 하는 실정이다. 해외 전통의학 교육과정과의 차이점을 보면, 6년이라는 한의대의 긴 교육 과정에 비해 최종 목표가 면허 취득이 되어 있는 우리의 상황과 확연히 대조되어 씁쓸함이 느껴진다.

 

(3) 진료실 밖, 무한한 가능성

한의대를 다니면서 임상의 외에 다른 길은 없을까? 평생 직업이 임상의밖에 없는 거라면 어느 지점에서는 그 평온한 안정감에서 오는 갑갑함이 분명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임상의, 전공의를 하다가도 방향을 틀어 우리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한의학적 지식은 임상 진료실 밖에서도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이 있다. 비록 아직은 소수이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선배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정책·공공의료계에서 단순히 정책을 따르는 입장이 아니라, 정책을 설계하는 위치에 선 한의사들이 있다. 보건복지부에 특채로 입사해 질병관리본부 등을 거쳐 보건 의료 전반을 지휘하는 국장급 공무원으로 활약하거나, 한국인 최초로 WHO(세계보건기구) 본부의 관리자로서 전통의학 국제 표준화를 주도한 선배의 사례는 우리에게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다는 울림을 준다. 또한 지난 팬데믹 당시, 한의사 면허를 가진 역학조사관들이 감염병 확산 경로를 추적하며 방역의 최전선을 지킨 것 또한 한의사의 공중보건 분야 전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였다.

또한 연구 분야에서도 임상 효능을 과학의 언어로 증명해내는 이들도 있다. 뇌영상(MRI) 기법을 활용해 침 치료의 기전을 뇌과학적으로 규명하거나, 권위 있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며 한의학의 신뢰도를 높이는 연구원들의 활약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일각의 편견을 깨부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인문계열의 학생들이 꽤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한의대에서 경영사업 및 다른 분야와의 융합에서 개척자로 활약하고 있는 사례들도 인상적이다. 한의사 면허는 산업계와 법조계에서도 강력한 전문 자격이 된다. 천연물 소재 신약을 개발해 바이오 벤처를 성공적으로 이끈 교수 창업가,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제약회사 경영인으로 변신해 한약의 산업화를 이끄는 선배들도 있다. 더 나아가 로스쿨을 거쳐 의료 전문 변호사로 변신해, 의학적 지식과 법률 지식을 결합하여 의료 분쟁 현장에서 활약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4) 사다리를 걷어차는 현실, 연구비 삭감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한의계는 학생들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대신, 그나마 있던 사다리마저 걷어차고 있다. 최근 정부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연구 정보를 제공하던 KMCRIC의 예산이 3억 원에서 4,000만 원으로 대폭 삭감되었다.

이는 단순한 예산 줄이기가 아니다. 학생들이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미래의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빼앗는 행위다. 10년 넘게 쌓아온 데이터베이스가 멈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어떤 학생이 감히 불확실한 연구자의 길을 걷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연구 인프라가 붕괴하면 근거 중심 의학(EBM)의 기반도 사라진다. 이는 결국 한의학 전체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5) 다양성은 생존의 조건이다

이제 1년 뒤면 나 역시 국가고시장에 들어선다. 그때는 지금의 막막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어 있기를, 나와 같이 졸업하는 학생들이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부원장전공의두 가지뿐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를 위해 전국 한의과대학은 임상 술기 위주의 교육을 넘어 데이터 사이언스, 제약 실무, 보건 정책 등을 다루는 융합 커리큘럼을 도입하는 변화를 추구하고,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필요함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한 정부와 한의계가 삭감된 연구 인프라 예산을 복구하고,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 선배들과 재학생을 이어주는 멘토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 같다.

한의학의 미래는 진료실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한의학의 영토를 확장할 때, 비로소 한의계는 생존을 넘어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만들지 않고 가지 않는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닦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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